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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여수(心如水)
현산 이현복
내가 살아오면서 받은 질문 중 어려운 것은 선생님의 좌우명이 뭐냐는 것입니다. 그런 거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지키지 못할 좌우명이라면 생각하지 않고 사는 자연스러움이라 했습니다. 끈질기게 물으면 ‘그냥’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그 때 생각나는 대로 열심히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려 했습니다. ‘지금 바로 여기’ 내 앞에 있는 존재만이
내 우주적 가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간, 순간 순간을 사는 존재입니다. ‘지금 바로 여기’는 언제나 다음 순간을 위한 준비의 전환접입니다.
부도수표와 같은 과거에 집착하는 일도, 약속어음 같은 내일의 두려움도 모두 접고,
현금과 같은 지금 이 순간 순간을 ‘그냥’ 살아가는 것이 내 삶입니다.
‘지금 바로 여기’가 미래의 영원한 통로라는 것만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모양을 만들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그냥 흘러가는 물같이 말입니다. 내일도 모래도 물처럼 살아가고 싶습니다.
생활한문을 가르치는 중에 노자(老子)의 상선약수(上善若水) 말에 눈동자가 커졌고,
심여수(心如水) 낱말에서 생각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냥’이란 말보다 좀 품위(?)가 있는 것 같은
심여수란 말을 머리 속에 언제나 담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후 물은 참 많은 덕을 지녔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선약수(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라 그렇습니다.
물은 형태를 만들어 체하거나 척하지 않습니다. 색깔도 냄새도 없는 순수 그대로입니다.
인간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하며 다투지 않습니다. 낮은 곳으로 가면서 메마른 곳에 들러
식물에게 수분을 공급하며 성장을 도우면서 흘러갑니다. 언제나 갈 때는 갈 줄 알고 머물 때 머물 줄 압니다.
고여 썩지 않으려고 끝없이 흘러갑니다. 한 방울 한 방울 큰 방울이 되고 내가 되고 강이 되어
마구 흐르는 것이 아니라 대양이란 목적지만 향해 갑니다.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투지 않으니 미움도 허물도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흙이건 세면이건 흩어진 것을 모으는 긍정의 힘도 지녔습니다. 가장 낮은 데 있으면서도
지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아량도 가졌습니다.
그뿐입니까. 혼탁을 지닌 물은 흐르면서 오염을 덜고 덜면서 끝내는 맑게 하는 정화의 능력도 지녔습니다.
나는 지급 한 컵의 물을 보고 있습니다.
이 먹을 물이 여기에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모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을까.
이 세상은 이렇게 오염되었습니다. 세속에 오염된 인간들 속에서 대기도 오염되고, 땅도 오염되고,
물까지 오염되어 이 우주는 오염에 갖가지로 오염된 내 심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심신을 정화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눈을 감았습니다. 답답함이 밀려옵니다.
“잡초를 끊임없이 솎아내지 않으면 나중에 논이 잡초 밭이 된다.”는 농부들의 교훈이 머리에 스칩니다.
내 육신의 밭에, 내 마음의 정원에 자리한 잡초를 솎아내야 한다. 훗날 그 순간까지.
자연 파괴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순간의 자연은 원형보존을 요구하고 있듯이 나 또한 내 원형을 찾아야 합니다
.
내 본질이요, 내 원형인 당신아!
물과 같은 마음으로 물처럼 살렵니다. 그것도 맹물처럼 살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파괴의 끝은 파멸임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과연 누구에게 이처럼 당돌하고 시건방진 관념어를 늘어놓을 수 있습니까?
나를 지금까지 지켜보아 나를 아는 당신이기에 아룁니다.
참으로 많이도 찌든 나였습니다. 때때로 당황했던 나, 무안했던 나, 개운치 않은 찜찜해 했던 나의 태도를,
어느 때는 얼굴에 똥바가지르 뒤집어쓴 몰골로 참담했던 그 모습을 당신만은 보았습니다.
나로 해서 그 누구도 불안하지 않게, 그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당신을 향한 나의 염원이요, 기도입니다.
그냥 ‘지급 라로 여기에서’ 물처럼 살고 싶습니다. 물이고 싶습니다.
<이현복 수필가>
1938년 경기도 성남 출생
호는 현산賢山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경희대학교 대학원 졸업
수필문학으로 석•박사학위 취득
초등학교 국어교과서 집필위원, 초등학교 국어교과서 심의위원
건국대, 경희대, 숙명여대, 경기대, 서울시립대 강의
현재 경인교대 명예교수
계간 수필춘추 편집주간
중앙일보 문화센터 수필문학 출강, MBC문화센터 수필문학 출강
저서 『문학을 찾아서』, 『국어교육론』,『인생과 수필 열 네 강좌』,『수필문학논고』,
『현대수필작가연구』, 『찻잔 속에 담은 인생』 논문 『국어교육 연구』,『경기도 전설 연구』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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