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혁이 택한 전자과와 내가 택한 금속과 와는 2학년 때 많은 과목을 같이 들었다. 고체물리, 물리화학 등이었다. 자연히 오면 가면 대화를 나눌 기회도 생겼다. 그러던 어느날 대학신문을 보다가 만화를 보고 깜짝 놀래었다. 저자가 원제혁이었고 내용도 재미있는 구상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김성환 만화가의 '고바우' 를 닮은 대학생이 "신공덕 달 밝은 밤에, 큰 배 옆에 끼고 작은 배 먹을 째에, 어디서 이놈 하는 호통에 ..."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그린 만화였다. 당시 태능과 신공덕동 사이에는 배밭이 많았는데 배가 달고 맛이 있었다. 흠이 있다면 저장기간이 매우 짧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요사이에는 그런 배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어떻든 배밭은 남녀 대학생들의 데이트 장소로서 적합하였다.
그 후에도 제혁은 아마 한 두 번 만화를 대학신문에 더 기재하였다. 그 때 이태섭(후에 과기부장관, 국회의원)이 대학신문 기자였는데 제혁과 같은 반(8반)에서 공부했기에 신문에 연재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았을가 생각하지만 한번도 물어본적이 없다. 만화 자체가 독특하고 재미있어 대학신문도 기꺼이 지면을 할애 했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나서 졸업시기까지 별 기억이 없다. 아마도 제혁은 대학 4학년 때 학도병으로 갔을 것으로 짐작한다.
나는 졸업 후에 군대에 들어갔고 그리고 나서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니 만날 기회도 없었고 또 제혁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게되었다. 몇 년 만에 고국에 들리면 공과대학 동기들이 모여 하루저녁을 유쾌히 지내느라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수가 없었다. 다만 풍문으로 그가 사업을 차리고 잘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으나 직접 문의 해 볼 기회가 없었다.
제혁과 Reconnect (좋은 단어가 없어 이렇게 쓴다) 하게 된 것은 청암회 회원들이 (이는 부고의 청량대와 불암산 계곡에 위치한 공대의 두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50주년 입학을 축하하기 위하여 부부동반으로 Las Vegas 지역을 여행하며 우정을 돈독하기 위함이다. 이 여행을 준비하고 실행하는데 시간과 계획에 제혁은 많은 시간을 소비하며 나와 대화를 나눈 덕분이다. 이 여행은 부부를 합하여 18명이나 참석한 큰 행사였다. 제혁이 이 행사를 위하여 준비하고 연락하는데 앞장서서 이 모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제혁은 50년 동안 세파에 많이 물들여 졌으리라 생각하였는데 그의 성품이나 행동이 50년 전이나 다름이 없어서 놀래었다.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찾았고 무엇이든 배우는 자세로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일관하였다. 그동안 한 때는 기업인으로 크게 성장한 때도 있었는데 아랑곳 안하고 아들에게 기업을 물려주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의 특유의 관찰력과 예지가 늘 풍겨 나왔다.
나는 제혁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하직 할 줄은 몰랐다. 그의 대범한 성격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1개월 전에도 나타났었다. "어 별거 아니어. 좀 나빴다가 좋아지기도 하지. 치료법은 없어도 유지는 된대..." 하며 자기의 병세를 담담히 말하던 그가 생각난다. 나는 어떻게 보면 우직한 그를 친구로 갖고 오래 우정을 나누게 된 것을 감사한다.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날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 쓸쓸하고 섭섭하기 만 하다. 갑짜기 연락하고 대화 할 친구가 없어져 아쉽다고 표현 한다면 너무 이기적이 아닌가 반문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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