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그 해 9월은 유난히 하늘이 높고 구름 한 점 없던 때였다. 햇볕은 따가워 모자 없이 나서기도 망설이는 날이었다. 그래도 날씨는 가을이 되어서인지 폭염이 시들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 뜻하지도 않게 형님은 능금을 따러 자하문 밖으로 원족을 가자는 것이었다.

           

나 보다 15살이나 연상인 형님은 평소 과묵하고 동생들 하고는 별로 말을 하지 않는 분이다. 그런 형의 모처럼의 요청을 어찌 마다 하겠는가. 서둘러 준비하고 나서는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남대문 역에서 전차를 타고 효자동 까지 가는대는 30분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효자동에서 내려 자하문 까지 걸어서 가니 포장이 되지 않은 길에 가끔 상인들이 내어 놓은 목판이 눈에 띠었다. 자하문이 보이는 곳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의 옆 수직면에는 움푹 파인 곳이 여러개 있었는데 파인 곳마다 빤질빤질한 조약돌들이 놓여 있었다.움푹 파인 곳에 떨어뜨리지 않고 미끄런 조약돌을 올려놓으면 아들이 생긴다고 저마다 돌을 올려놓고 간 모양이다. 이런 돌들이 혹시 미끄러 떨어질까 보며 천천히 걷고 있는데 갑자기 형의 보행 속도가 빠름을 눈치 채었다. 나는 뒤에서 황급히 쫓아서 따라 가고 있는데 화사한 복장의 여인이 양산을 들고 형을 자하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형은 내게 누구를 만난다고 언질을 준적도 없었다. 당혹스럽기만 한 나를 그녀에게 "동생을 데리고 나왔어" 하며 간단히 소개 한 뒤에 양산의 여인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궁금증이 나도 서너 발치 멀리서 뒤따라갔다. 우리가 처음 들린 곳은 닥종이를 만드는 제조공장이었다. 아마도 서예에 깊은 관심을 가진 형이 한지를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닥나무를 펄프로 곱게 만든 후에 큰 스크린으로 펄프를 골고루 골라 건져내어 그늘에 말린 후에 다시 서늘한 곳에서 말리면  닥종이가 된다. 나는 닥종이를 만드는공정도 재미있었지만 여인에 대한 궁금증이 더하여 비로소 슬쩍 쳐다보니 꽤나 미인이었다. 성격도 쾌활하고 적극적으로 보였다. 형과 무슨 얘기를 하는 모양인데 형은 듣기만 하고 여인은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미가 있는지 까르르 웃기까지 한다.

닥종이 공장을 구경하고 이번에는 제법 물이 흐르는 개울을 건너 산 비스듬히 놓인 능금과수원을 찾았다. 사실 우리는 능금을 사러 온 것은 아니고 원족을 온 것이기에 흥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주인도 양장을 한 젊은 여인과 신사복의 남자 그리고 10살이 안된 소년이 있으니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는 빨갛고 노란 능금 20여개를 골라 사가지고 나왔다. 무겁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피가 있어 자루에 넣고 내가 뒤 쫓아 걸어 나왔다.

능금이란 말은 요사이는 서투른 것 같다. 당시 서울에서 능금이라고 부르는 과일은 사과나무를 다른 나무에 접부치지 않고 그대로 키워서 열매를 맺은 과일을 지칭하였다. 사과 맛을 가졌지만 크기가 오늘날의 작은 자두만큼 되었다. 색깔은 앵두같이 노랗고 빨갛다고 하겠다. 잘 익으면 달고 시원하여 젊은이들이 좋아 하였다고 생각된다.

자루를 가지고 셋이서 앉을 마땅한 장소가 없기에 우리는 오던 개울로 갔다. 형과 양장의 여인은 시냇가의 바위 위에 앉았고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별 볼일이 없어 물속에 모래무지가 있지 않을까 관찰하고 있었다. 슬며시 여인이 내게 와서 능금자루를 보잔다. 그리고 능금을 10개 정도 꺼내어 손으로 씻었다.

그러고 나서 자기 핸드백에서 예쁜 손수건을 꺼내더니 네 개 정도의 능금을 손수건으로 싸서 나더러 조금 깊고 흐르는 냇물에 담그라는 것이다. 나는 예쁜 손수건이 젖는 것이 미안하여 망설이는데 능금이 차가워야 맛이 있단다. 사실 그 곳의 물은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흙탕물은 아니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라 그런지 제법 차가웠다.

한참 후에 능금을 꺼내어 먹으니 달고 시원하였다. 우리는 반복하여 능금을 손수건에 싸서 넣고 꺼내기를 여러 번 능금으로 끼니를 때웠다. 나중에 알았지만 여인은 형이 과장으로 있는 공보처 보도과 직원이었다. 형의 수하에 한 50여명 일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반수 정도는 여직원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주로 타이핑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에 나온 글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이니 다른 과보다 여자의 비중이 컷다고 했다.

형은 내가 보기에는 우리 집에서 가장 잘 생긴 남자였다. 과묵하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투철한 총각과장이니 아마도 여직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리라. 그런데 형은 사실 한 번도 그 때까지 연애를 해 본적도 없었다. 잘 모르지만 수집은 성격의 소유자라 생각한다. 호감이 가는 여직원이 자하문 밖에서 테이트를 하자니 퍽이나 고민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동생을 대동하고 가는 묘한 생각을 짜아 내었으리라 짐작한다.

사실 여직원이 상사와 데이트를 하는 것은 오해를 부를 소지가 있고 잘 못하다가는 추문이 될 여지가 있다. 더구나 신문, 방송, 잡지를 관장하는 보도과에는 수시로 기자들이 드나든다. 조그만 일이라도 꼬투리를 잡히면 그 것을 빌미로 기자들에게 약점을 잡힐 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 전체의 사기가 저하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회사나 관청에서는 내규로 이를 금하고 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철부지 소년인 나는 형이 부럽기도하고 야속하기도하고 왜 좋은 곳에 가서 멋지게 연애도 못하는가 하는 불평도 있었다. 형은 모든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는 선비적 기질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형은 참외밭에 가서 결코 구두끈을 고치어 매지 않는 그런 분이 였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참외밭에 가서 구두끈을 매는척 하다가 참외를 훔치어 먹고는 구두끈을 매었다고 주장한다. 공직자의 윤리를 논하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나 자기들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는 공익의 배치되는 일들을 서슴치 않는다. 누구나 하면 안되는일들을 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피하는 것이 능력있는 공직자라고 말한다.

형은 누구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공직자의 윤리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 된다. 어떤 일은 답답하고 너무나 공적으로 대한다고 형의 친구가 청탁을 하러 갔다가 와서 불평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기에 6.25가 나고 폐병 3기라고 할 때 아마도 고칠 수가 없는 병이라고 판단하고 더 이상 손을 쓰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항생제가 발달 되면서 폐병의 치료가 가능 할 즈음인데 약을 구할 길이 없었다. 공직을 이용하여 강제로 부탁을 할 수도 있었을 때였다. 그런데도 편법을 쓰지 않은 형을 이제와서 나무랄 생각은 없다.아니 오늘날과 같이 혼잡한 세상 가운데  이 같은 태도는 공직자의 귀범이 되리라 생각한다.

형을 피난 중에 잃고 서울로 환도 한 후에 가곡 "바위고개"가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가만히 그 내용을 음미하여 보니 비록 주객은 바뀌었지만 그 바위고개가 자하문이란 생각이 들어 눈물을 적신 적이 있었다. 그래서 능금 먹던 원족을 잊지 않고 지금도 기억하게 된 모양이다.

능금을 손수건에 싸서 흐르는 물에 담구어 놓았던 한 폭의 아름다운 정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고 능금의 달고 시원한 맛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문득 그 양장의 여인을 만나 보고 싶다. 적극적이고 낙천적인 그였기에 지금도 생을 즐기고 있으리라 믿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