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분간의 침묵" 의 파노라마를 연상하다가 잠을 설치고 가까스로 잠이 들었는데 다음날 새벽의 목탁소리에 그만 깨어났다. 우리는 주지스님에게 부탁하여 대웅전 불상 뒤에 구석진 곳에 침소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주지스님은 속인들이 와서 대웅전 뒷구석에서 잔다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으나 건장한 청년들과 수색중대장의 무언의 압박으로 내키지 않지만 허락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조용히 나와 개울가로 가서 아침겸 점심을 준비하여 먹고 나니 11시 경이 되었다. 일정은 대청봉 아래 봉정암으로 가서 그 곳에서 저녁을 지내고 다음날 정상에 오른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가는 길은 분명히 지도에 나와 있는데 군대가 주둔하면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놓아서 혼동을 일으키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전쟁의 잔유품인 군화, 철모, 탄피들이 놓여있어 격전지였음을 실감하게 하였다.

전 날 저녁 수색중대장은 우리에게 설악산 인근에는 공비가 살아졌지만 북한과의 접속 책들이 지나가는 곳이니 특별히 개인행동은 삼가하고 저녁에는 움직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아마도 밤에는 수색중대원들이 이들을 색출하려고 활동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아침을 끝내고 4 ~ 5시간 만에 봉정암에 도착 할 수가 있었다.

봉정암에는 거주하는 승이 없었으나 며칠 전에 누가 왔다 갔는지 깨끗이 치워 있었다. 조금 내려가면 샘물이 있어 식사 준비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그런데 저녁을 준비하려하니 몇 몇 친구들은 자기 쌀을 쓰라는 것이다. 자기만이 가볍게 여행하고 싶은 욕심의 발로인 것이다. 나는 속으로 실망하였지만 친구사회에서도 이기적 행동이 동행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그날 저녁은 조용한 암자에서 충분한 수면으로 피로를 풀 수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쉽게 대청봉에 오를 수가 있었다. 고산지대가 되어서 그런지 나무들은 키가 작고 볼품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바람과 눈비로 자라기도 어려우리라 짐작을 했다. 막상 쉽게 정상에 오르니 기분은 장쾌하였지만 기대감에 미치지 못하였다. 나는 사실 인수봉 같은 바위덩어리가 정상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래서 밧줄도 준비하였고 조광호는 바위에 오르는 장비도 가져왔던 것이다.

정상에서 잠간 쉬고 하산을 준비하는데 우리는 지도에서 신흥사를 가르치는 길을 찾아내려 가기로 하였다. 이 길은 내리막 길이라 뛰어서 내려갔다. 한 두어 시간 뛰다가 지도를 보니 산의 형세와 지형이 다른 것이었다. 그래도 한참 내려가면 우리가 목표로 하는 지점을 만나겠지 하고 다시 1시간을 달렸다. 그 때 우리는 나침판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이제는 상당히 산 밑으로 내려 왔는데 지도와 계곡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순간 우리는 공포감이 엄습하였다. 이러다가 혹 이북과의 경계선을 넘은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날은 어둑해 오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의 결정을 내렸다. 첫째는 우리가 물이 흐르는 계곡 인근에서 잠자리를 마련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산중에 있으면 말하는 것이 멀리 까지 들리게 되고 이를 알면 침입자가 쉽게 접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계곡의 물소리가 커서 우리의 말소리는 외부에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둘째로 물소리는 들리되 조금 높은 지대에 천막을 치기로 하였다. 갑자기 비로 인하여 계곡의 물이 불어나더라도 좀 높은 곳에 있어 시간을 두고 피할 수가 있는 여유가 있어야 된다는 이유였다. 셋째로 좁더라도 한 곳에서 잠자리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두개의 소형 텐트를 준비하여 왔는데 그 중에서 큰 곳에 모두 들어가 잠을 자기로 하였다. 혹시나 불청객이 들어와 해를 주더라도 함께 있으면 방어 할 인력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고 나니 김장섭은 담배꽁초를 모은 것을 텐트 주위에 뿌렸다. 해충이 못 들어오도록 배려하는 것이었다.

불편한 곳에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알 길은 없다. 조각돌들 위에 담요를 깔고 누웠는데 콕콕 쑤시어서 불편하였는데 그래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며 계곡을 넘어 올라 가보니 밭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인가가 멀지 않을 텐데 하며 어제 밤의 염려가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서둘러 여장을 정리하고 길로 걸어가다가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이곳이 어디인가를 물으니 양양이라고 했다. 신흥사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려 온 것이다.

양양에는 고인이 된 김흥기가 사는 곳이었다. 우리가 그의 집을 찾아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도 그는 서울에 있었지 않나 생각하여 본다. 만났다면 분명히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었을 것이다. 인근의 약수터는 기억이 난다. 어찌나 철분이 많은지 물이붉었고 마시기에는 꺼림직하지만 한모금은 마신 것으로 기억한다.

그 날 우리는 걸어서 낙산사 근처의 해수욕장에서 여장을 풀었다. 우리가 절을 택하였든 이유는 식수 때문이었다. 밥을 짓고 간혹 빨래를 하려면 역시 물이 있는 곳이 편하였기 때문이다. 그날 밤 우리는 모래사장에서 잠을 자는데 모기가 담요를 뚫고 무는 바람에 아주 고생을 하였다. 바다바람이 부는 곳에도 사나운 모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다음 날 신흥사에 도착하니 몇 몇 관광객이 눈에 띄었다. 신흥사는 보통 절과 달리 경회루 같은 건물이 있다는 것이 인상에 남았다. 우리는 서둘러 비선대(그렇게 바위에 쓰여 있기 때문이다)와 이름을 모르는 폭포를 구경하였다.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하고 맑은 물은 그동안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어린아이들 같이 물가에서 놀다가 저녁을 해서 먹고 인근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속초를 향하여 떠났다. 우리 중의 일부는 속초에서 서울로 떠났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대원들은 강릉으로 향하였다. 처음부터 계획하여서 일부가 떠났는지 아니면 여행이 피곤하여서 일찍 떠나겠다고하여 떠났는지 기억에 없다. 그렇다고 말다툼이나 의견차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떠내고 보면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이 인간의 상정인가 보다.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 우리의 일정을 재촉하였다. 뻐스로 강릉으로 가는 길에 오대산으로 가는 입구에서 내려 월정사로 향하였다.

남은 대원은 5명으로 기억하고 있다. 간편하여 져서 우리 일행은 결정을 쉽게 내렸고 걷는 속도도 빠르게 되었다는 기억이 난다. 오대산은 설악산과 달리 지세가 완만한 것이 특징이었다. 여태껏 나는 6.25 전쟁 중에 월정사는 타서 손실이 되지 않고 상원사만 탄 줄로 기억하여 왔다. 그런데 이 기억이 정 반대임을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는 월정사에 도착하여 폐허가 된 뜰에서 여정을 풀었다.

다음날 우리는 상원사를 경유하여 오대산에 올랐다. 역시 산기슭에 있는 나무들의 키는 작았지만 대청봉과 달리 나무들의 숲이 이룩되어 경관이 좋았다. 여기에서 찍은 사진은 몇 년 전까지 보관하여 두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찾을 길이 없다. 그날 우리는 일찍이 하산하여 강릉으로 들어갔다.

강릉에서 관동8경이라고 하여 여러 번 말로만 들었던 경포대를 찾아갔다. 바다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모래사장은 보이나 주위가 지저분 하고 별로 볼 것이 없어 실망하였다. 혹시 내가 너무 기대감을 갖고 찾은 것은 아닌지 반문하여 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만의 실망은 아닌지 다음날 아침 서울로 향하자고 하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일정은 끝을 맺었다.